최신 가르침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을 경험함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을 경험함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을 경험함

하나님께서는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당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체험 할 
수 있으며, 그분과의 교제 가운데 들어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책은 인격이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과 성령님에 관한 성경적인 계시를 발견 할 수 있는 여정으로 안내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지식과 경험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영적 굶주림이 있으십니까? 하나님과의 더 가까운 교제와 교
통 가운데 예배의 산을 오르기를 갈망하십니까?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이 16 가지이며, 인류가 너무나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측면을 각 이름 가운데 계시하심을 
아십니까?
삼위일체의 각 인격들 사이의 연합을 따른 참된 영적 연합에 대해 더 많이 배우기 원하십니까?
이 세대의 영적 상황과 그 원인 및 그것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기 원하십니까?
이 책에서는 삼위일체의 신비, 삼위일체의 인격들간의 교제,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반영되는지에 대해 알게 
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인격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사역, 선지자와 교사로서의 사역, 대제사장이시며 동시에 최고의 희생 제물 되심과, 부활하신 주님과 왕으로서의 사역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또한 성령님과 교회 안에서 그분의 일하심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이 책은 위의 질문들에 대해 성경적, 신학적, 그리고 교부학적인 관점의 대답을 제시하며,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이해와 
성삼위와의 교제 가운데서의 삶의 경험을 반영하는 교부들의 저술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분열된 요소들을 그분의 신성한 힘의 시멘트로 다시 결합하시고 굳히셨습니다. 갈라지고 절단된 것을 결코 파
괴되지 않을 연합으로 재결합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활입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우스, The Great Catechism)
“희생 제물 되심과 부활을 통해 승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이기적인 열정으로부터 정결하게 됨을 통해 하나님
에 대한 지식과 신성한 생명의 정상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키릴로스, Glaphy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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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삶의 기초 3-4 : 인격이신 성령님

A.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시각

IV.인격이신 성령님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행2:32-33)

이 말씀은 오순절 날의 일입니다.

성령님은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신 위대하고 놀라우신 선물이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이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미지를 쉽게 그릴 수 있습니다.

또한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아들에 대한 이미지도 쉽게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을 인격의 이미지로 그리기란 쉽지않습니다. 우리는 자주 성령님을 보이지 않는 영, 혹은 능력으로 생각합니다.성령님은 능력이시지만 그분은 또한 인격이십니다. 삼위일체의 각 위는 인격으로서 구별된 역할을 하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유일한 하나님으로 완전히 연합되어 계십니다.

따라서 성령님은 삼위의 한 인격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도록 아버지께로 부터 오신 선물이십니다. 성령님은 ‘파라클레테(Paraclete)’라고 불리시는데, 내 옆에서 항상 함께 동행하시며 적으로 부터 나를 보호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또한 내 안에도 거하십니다. 즉 성령님은 내 안에도, 그리고 내 옆에도 계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내가 갈 길을 잘 모르고 여행의 여정에서 적들과 대면할 수 있기 때문에 내 손을 잡고 함께 걷기를 원하십니다.  


영적 삶의 기초 3-3: 성자 예수님

A.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시각

III. 성자 (예수님)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인격이신 예수님은 동시에 신비이시며 또한 계시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비이십니다[1].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2] 계시며 그분과 연합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의 품에서 나오셔서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아버지가 누구이신지 이해하도록 도와주십니다.

그 신비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영세 전부터 감추어 졌다가, 때가 찼을 때, 계시되어[3]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이신지를 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성육신 하셨고 우리의 구원과 구속이 되셨습니다[4].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시고, 우리의 구원과 구속을 계시 해 주신 신비이십니다.

인격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님은 "로고스 (Logos)," 즉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페이지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동시에 그 말씀의 각 장들은 우리에게 신비에 대해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즉,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해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성경에 계시되셨습니다. 성경은 성육신하신, 인격체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구절들과 장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모세의 글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창조를 완성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5]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있으라 하시니... 있었고.”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비입니다 (즉, 그분은 말씀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품)에 계시며 그분과 연합을 이루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말씀하실 때, 그분이 말씀하시는 모든 말씀은 생명과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인류에게 나아가는, 인류를 향한 바로 그리스도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신비이시며 계시이십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첫 번째 계시는,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손길을 통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손길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그분의 말씀은 창조의 행위입니다; 즉, 그분의 말씀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의 행위입니다.

잠언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잠언 8: 30, 31).

여기서 그리스도는 지혜 그 자체로써, 성육신 하신 모습으로 말씀하십니다 (지혜의 성육신화). 그리스도는 지혜이십니다[6].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지혜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그분의 입술에서 지혜가 나오며, 우리의 생각 가운데 경이와 능력으로 가득 채우시고,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의 모든 뜻과 계획을 행하신 하나님의 능력 이십니다[7].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계획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인격체이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행하고 완성한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말씀이시며, 지혜이시고, 하나님의 능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향한 계획을 세우시고,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기 원한다면, 그분의 뜻과 계획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말씀이시며 하나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는 신성한 지혜이시며 신성한 말씀이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신성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을 향한 계획을 예비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 (에베소서 2:10).

신약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시기 전에도 우리는 시편에서 구원자이시며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에서도 메시아, 구속자 그리고 구원자에 대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와 영적인 연약함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 뿐만 아니라, 어려운 상황들, 문제들 및 환난에서 구원하시고, 구해주십니다.[8] 그분은 사단의 모든 악한 계획에서 우리를 구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마땅히 심판 받을 우리의 자리를 취하시고, 당신의 의의 자리를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속/속량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에서 우리를 구하십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볼 수 있는 그분의 모습입니다.

그분은 모든 세대가 기다린 분, 모든 시편과 찬송의 대상이신 메시아이십니다. 메시아에 관해 말한 첫 번째 사람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였습니다 (그녀의 찬송 가운데 언급).[9] 성모 마리아가 자신의 찬송 가운데 한나의 찬송의 일부를 취한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한나는 메시아에 관해 처음으로 언급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 즉 메시아의 어머니는 한나의 찬송의 일부를 가져다가 자신의 찬송에 넣었던 것입니다[10].

그들이 기다리고 찬송한 메시아는 모든 문제로부터 구원하시고 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실제로, 영적 문제들과 죄는 우리가 세상에서 직면하는 문제와 어려운 상황들을 초래합니다. 사단과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그 문제들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내면의 삶 가운데 구속의 역사/일하심을 받아 들이게 되면, 우리의 외적인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 보일지라도 그것은 풀어지고 해결됩니다. 천사들과 신성한 임재가 있는 특별한 영적인 영역이 우리를 둘러싸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그들이 침입하거나 침투하는 것이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메시아께서 우리의 내면을, 또한 외적인 모든 부분에서도 구원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내면과 외적인 것들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두 부분을 모두 다 바로잡으시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또한 여러 방식으로 그리스도에 관해 언급했습니다. 각 선지자는 다른 선지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스가랴는 그분을 포도주와 곡식처럼 매우 부드럽고 온유한 분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스가랴 9 : 17)

이 말씀 가운데 깊고 신성한 진리가 있습니다. 아담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고 실행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와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아담의 어려움을 흡수하고 그의 힘과 에너지를 새롭게 해주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을 때 아담은 지배하기를 원하는 신이 되었고 하와는 지상에서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구속자께서 피조물을 첫 모습, 처음의 아름다움과 그 영광으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새 아담 (즉, 구속 받은 속사람)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곡식으로 당신을 내어 주신다고 스가랴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새 아담은 그리스도를 먹고 그분에게서 영양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새로운 속사람이 자랄 수 있게 하는 곡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를 강건하게 해서 지상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 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하와가 마셔서 그녀 안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참으로 말미암아 이 땅의 기쁨이 되며 이 땅의 모든 어려움을 올려드릴 수 있는 포도주가 되십니다[11].

미가는 그리스도를 통치자, 다스리실 분으로 바라보았으며, 그분의 기원/근본은 아득한 옛날(상고) 까지 올라간다고 기록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미가 5:2).

그분은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모든 것을 향한 경륜을 갖고 계십니다. 그 누구도 그분보다 높거나 큰 자는 없습니다. 그분의 지혜보다 높은 지혜는 없습니다.  그분은 각 사람의 삶을 향한 경륜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은 마치 선율과 같은 것, 교향곡과 같은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삶은 지상에서의 교향곡이 되는 것입니다.

미가는 그분을 인간의 삶을 향한 경륜과 계획을 갖고 계신 통치자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열방을 다스리시는 분, 열방의 통치자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은 열왕의 왕이시며, 천하의 모든 왕의 왕 되심을 알았습니다. 그분을 통해 이 땅의 통치자들은 각자의 나라를 국가를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분을 “실로 (Shiloh)”로 바라 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일을 당신의 손안에 갖고 계신 ”을 의미합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세기 49:10).

우리의 모든 일들은 우리의 매니저나 상사의 손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은 그분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일은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학개는 그분을 “모든 나라의 보배 (모든 민족의 소원, the Desire of All Nations)”로 바라 보았습니다[12]. 그분이 언급 될 때마다, 그분을 원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께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그분을 더 원하고 더 많이 그 분을 사랑하게 됩니다.

솔로몬은  그분을 신랑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신부가 준비되는 신랑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솔로몬은 가장 멋진 표현을 사용하여 그분을 묘사했습니다 :

 “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아가서5:10).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아가서1: 12).

그분은 자신의 신부(개인이든 교회이든)에게 사랑을 쏟으시는 신랑이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가짜/거짓 사랑으로부터 우리의 감정을 정결케 하고 우리를 만족케 하는, 진정한 사랑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은 특별한 사랑으로만 채워지고 만족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분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그분은 성육신하신 사랑입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어 주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사랑이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특별한 종류의 신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소속되기 원하는 필요, 보살핌 받고 따뜻한 애정을 받기 원하는 필요 등, 우리의 깊은 내면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시는 특별한 종류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감정, 느낌, 애정을 만족시켜 주시는 신부적인 사랑을 주십니다. 이러한 우리의 감정들은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여러 곳에서 사랑을 받기 위해 구걸하게 됩니다. 우리의 감정은, 사랑을 구걸하면 할수록 상처를 받고 노출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신부적 사랑이며, 부요한 것이며 우리를 만족케 하십니다.

이제 신약을 보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네 명의 저자들 (전도자들, evangelists) 각자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바라 보았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분을 바라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사자로, 독수리로, 왕으로, 그리고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깊은 경외함으로 그분을 왕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을 모든 능력과 권세를 지니신, 그래서 사단을 정복할 수 있는 사자로 바라보았습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을 지라도(베드로전서 5 : 8) 유대 지파의 사자는(계시록 5 : 5) 마귀를 물리 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또한 그분을 부드럽고 다정하신, 당신의 피조물을 향한 연민과 애정이 가득한 인간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염려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여성들이 존중 받거나 잘 대우받지 않는 시대에(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여성들을 돌보시고 그들을 돌아보셨습니다. 복음서에 그리스도의 기적들이 언급 될 때 우리는 그 중 절반이 남성을 위해 행해졌고 나머지 절반은 여성을 위해 행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비유들에서도 절반은 남성을 예로 드시고 나머지 절반은 여성을 예로 드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알아 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성들에게 그들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시키고 남성과 여성의 존귀함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강조 하셨기 때문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함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너희는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 : 28).

창세기 1장 27절에서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비되심과 어미되심을 (Fatherhood and Motherhood) 지니고 계십니다. 그래서 인간 가운데 당신을 반영하고 나타내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두 가지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둘은 동등하고 평등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바울이 히브리서와 골로새서에서 기록했듯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 하셨고, 남자와 여자는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에게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질병을 가진 아들(마태복음 17:14-18)과 가나안 여인의 딸(마태복음 15:16-28)을 고치셨습니다. 그분의 비유에서도 남자와 여자 모두를 예로 드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시며,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를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21). 그분께서는 피조물 모두에게 오셨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그리스도를 예물과 제사 드리시는 대제사장으로 바라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예물과 제사를 드리고 계시다고 기록했습니다 (히브리서 7:25, 8:1~3).

사도 요한은 그분을 떠오르는 독수리, 즉 성육신하신 신성하신 주님으로 바라 보았습니다[13]. 그분의 신성은 매우 높으시고 동시에 그분의 성육신 가운데서 인간과도 매우 가까우십니다.

요한 복음을 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 즉 그분이 하나님 이심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 복음서의 어떤 ​​부분을 읽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입장 가운데 두면서 그분과 같은 말을 하거나 같은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요한복음 18:37). 우리 중 누구든지 우리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발견한 후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요한복음 17:4).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 일을 완성하며 안식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해야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신성으로, 그리고 동시에 보내심 받은 아들로 나타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말을 우리도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우리 삶 가운데 적용 할 수 있습니다. 성자이신 아들은 우리 각자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기도를 드리며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의 앞부분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2).

사도 요한은, 그분의 복음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고 있음을 강조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은 성육신하신 신성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십니다 (God-Man).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시기 위해 아들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그분과 같은 기도를 드리고, 성자 아들 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안에서의 우리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 다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 (사도행전 4:12).

사도행전을 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선포하고 전파하는 메시지가 되셨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사람을 가르침은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로새서 1:28). 로마서 1장 5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리스도께서는 선포 되어야 할 메시지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구속과 ​​구원과 생명과 자비와 진리와 길 되심의 메시지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6). 그분은 우리가 자랑스러워 해야 할 메시지이십니다.

서신서도 교회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신서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모세가 성막에 관해 말한 것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성막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림자이며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만나이시며, 언약궤이시고 , 진설병을 위한 상이시고, 그분의 구속의 모든 신비를 지니신 놋 제단이시며, 그분의 기도와 중보의 모든 신비의 순금의 분향단이십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와 같은 그림자와 상징들이 계시된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으며[14], 교회에 영양을 공급하는  끊임없는 음식이 되셨습니다.

서신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의 믿음의 근원이시고 믿음을 완성하시는(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히브리서 12:2). 그리스도는 교회가 세상에서 머무르는 동안 이 땅에서의 역할과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교회 앞에서 나아가십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때, 그분은 교회(신부)가 선포하고 드러낸 신랑이 되실 것이며, 교회는 그분의 영화로운 신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될 것입니다.[15]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선포 된 왕이 되시고, 그분의 구속과 영광의 온전한 능력과 힘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당신과 연합한 신부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소개하실 것입니다.  신부는 그분의 뼈와 살로써,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고(에베소서 5:27,30) 그분과 같이 거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충만으로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처럼 이야기는 시작과 똑같이 끝을 맺게 됩니다. 그분의 삼위일체가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그분의 계획이 계시되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을 통해 원수가 방해하자, 그분의 구속이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수행되고 완성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신랑과 연합한 신부가 드러나고, 신부가 아버지께 드려짐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5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만유 안에 계시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와 연합하여 교회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과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시며 그분의 본질과 동일 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에 대한 간략한 개요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이해하고 그분을 구하면, 우리는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생명의 신비로서 영접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그분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2절에서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신비라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채우시고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신비이십니다. 그분의 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의 삶 전체가 그분의 것이 됩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르고 그분과의 교제를 시작할 때 우리의 삶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분은 머리 되시고,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시며 완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일하심:

마지막으로, 신약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일하심, 이 두 가지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갈 수 있도록, 우리가 변화되어야 하는, 우리의 본보기와 모범, 살아계신 형상이 되시도록, 신약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성품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8 : 29).

동시에 신약은 그분의 일하심, 그분의 구속의 역사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속의 역사가 우리의 속사람 가운데 더 들어올수록,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더 많이 변화되고 그분을 더 좇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서신서는 그리스도의 일하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는 인격이신 그분의 성품을 다양한 각도에서 묘사합니다. 그래서 우리 내면 가운데 그 형상을 흡수 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과 구속의 원인/이유이십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류이며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은 영광의 소망이십니다 (골로새서 1:27).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알고 성령님의 동반자 되심을 경험합니다. 그분은 시작과 끝이십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자요 (계시록 1:8).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성령님을 우리의 동반자로, 그리고 보혜사로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4 복음서는 그리스도를 다양한 각도에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그분의 발자국의 윤곽을 나타내 주며, 그분께서 어떻게 이 땅에서 사셨는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것을 읽고, 묵상하며, 흡수하고, 이것을 먹고, 마시고,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해야 합니다 (신명기 6:7). 그러면 성령님께서 점차적으로 인격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의 눈이, 인격이신 그분을 향해 더 많이 열릴수록, 우리는 더 많이 변화되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분과의 교제를 누릴 수 있게 하시는 열쇠이시자 문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성령님과의 교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가 우리 안에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고 또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구약에서 우리는 희생 제물이 피를 흘린 후에 기름이 부어 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리스도께서 “ 이루었다 고 말씀하신 후에, 성령님께서 오순절 날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만 성령님과 교통 할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며,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양자됨의 특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문이십니다. 그분은 시작과 끝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다른 방법으로 읽어야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이미 여러 번 읽은 이야기들로, 새로운 것이 없는, 단순히 기적들과 비유들의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이미 아는 내용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서는 타락한 세상에 들어오셔서 그 세상을 밝혀주시고,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살아있는 신성한 인간의 모범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신성한 성육신 하신 인간이 우리의 세상 가운데서 걷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비우시고 인간의 형상을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바라 보면서, 우리가 타락에서 자유로울 때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볼 수 있게 되며, 그렇게 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 바로 그분 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날들이 어땠는지, 그분이 행하신 일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분이 어떻게 행동 하셨는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한 장 한 장을 읽을 때 바라보기 원하는 분이며, 묵상하기 원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분이 살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그분의 삶의 신비를 우리 삶에 부어 달라고 그분께 무릎 꿇고 간구합니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선물을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자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이 땅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기뻐 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짐을 선포할 수 있게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4 복음서를 읽어야하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우리가 그분이 행하셨던 것처럼, 그분이 걸으셨던 것처럼[16] 행하고 걸을 수 있도록, 그분을 제대로 보게 도와달라고 그분께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부름 받았고 그분은 우리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원하시기 떄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온전해진 인간이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면서 어떻게 걷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동일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성은 그분처럼 온전하지 못하지만, 그분의 구속의 역사를 통해 속량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행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분처럼 우리의 능력으로써 그렇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은혜를 통한 강건케 됨과, 우리 안에 일하시는 당신의 성령을 통해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고, 교회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방식으로 살수 있게 합니다. 교회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세워졌으며, 이어지는 장에서 교회가 어떻게 움직이고, 사역하고, 핍박과 고통을 받았으며, 어떻게 사단을 이기고, 어떻게 빛과 생명을 세상에 전파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서신서는 그리스도의 일하심, 즉 그분의 구속의 역사에 대해 알려줍니다.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인격을 반영하고, 서신서는 그분의 구속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와 서신서 사이에는 사도행전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구속 역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구속 역사를 선포합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먹고 마시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말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입니다. 교회는 그분의 몸입니다. 교회는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합니다. 교회는 어둠과 죄, 죽음 가운데 처해있는 인류에게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생명과 빛이 있다 ” 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메시지입니다. 교회는 이 메시지를 구호 또는 표어로, 혹은 싸움으로 전해서는 안됩니다. 겸손으로 가득 찬 거룩한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죽기까지 희생 할 준비를 하며 전해야 합니다.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요한계시록 12:11).

그리스도의 신비가 사람들에게 미치기 원한다면, 우리가 그분이 걸으신 길을 걷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죽으셨듯이, 우리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사랑을 통해, 겸손을 통해, 겸허함을 통해, 심지어 필요한 경우 피 흘림을 통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땅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서신서에서는 구속의 역사에 대해, 그리고 교회가 구속의 역사를 통해 (위에서 설명한대로), 어떻게 살 수 있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속의 역사는 각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고, 그들을 연합하게 하며, 머리와 연합한 진정한 몸으로 만듭니다. 이로 인해 온전한 사람 ”이 됩니다(에베소서 4:13). 이 온전한 사람은 마치 그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듯 이 땅을 걸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교회임에도 우리의 머리와 연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연합된 지체가 되어, 하나의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머리와 연합 될 수 있는 것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합된 지체들이 되기 위해서는, 각 지체가 구속의 역사를 계속 경험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성령님께서 그 지체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구속 받은 지체들을 연결시켜 머리와 연합 할 준비된 몸으로 만드십니다. 그렇게 될 때, 생명이 풍성하게 흐르게 될 것입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시편 133:2). 이 옷들은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전파되도록 세상을 향에 펼쳐질 것입니다 .

그러므로 서신서를 읽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하심과, 십자가의 역사와, 예수님의 보혈의 역사,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 그리스도의 승천의 역사, 그분이 우리 안에 부어 주신 성령님의 역사, 구속의 역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위대하고 신성한 역사/일하심을 통해 어떻게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격이신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면서 그분을 보기 원하는 마음으로 복음서를 읽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신서를 읽을 때, 우리는 구속 받은 사람이 되기 위해, 즉, 구속 받은 지체로써 성령님께서 연합 시키시고 머리에 연결된 살아있는 몸이 되기 위해,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과 그로부터 어떻게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이런 온전한 사람, 즉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성취하는, 이 땅의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성육신의 몸으로 하신 그대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실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오셨고, 그분의 교회는 이 구속의 역사를 선포하는 자가 (즉, 그리스도가 되는 것)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구속은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Kingdom) 되며 왕 (King)이 오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Your Kingdom come)” (마태복음 6:10).

 

[1] 골로새서 2:2

[2] 요한복음 1:18

[3] 로마서 16:25, 26

[4] 에베소서 1:7

[5] 골로새서  1:16

[6] 고린도전서 1:30

[7]고린도전서1:24

[8] 시편 103:4

[9]  사무엘상 2:10

[10] 누가복음 1:46 – 55

[11] 요한복음 6:55 – 58

[12] 학개 2:7

[13] 요한복음 1:1 – 5

[14] 골로새서 2:19

[15] 계시록 19:7

[16] 요한일서 2:6


영적 삶의 기초 3-2: 하나님 아버지 (성부)

A.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시각

II. 하나님 아버지 (성부)

우리는 영적 삶의 기초에 대한 시리즈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기초와 기반은 사역/목회에 부름 받고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사역은 사역자/목회자의 영적 삶이 선하고 견고한 기초와 토대 위에 세워지고 성립되었는지 아닌지를 반영하는 척도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사역 할 때 우리에게 좋은 기초와 토대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든 이에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역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의 동료 사역자들 및 우리 자신에게, 또한 하늘에게도 (우리를 경청하고 섬기는 천사들에게도) 확실히, 분명하게 드러납니다[1]. 천사들은 구속의 신비, 사랑의 신비,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듣기를 원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그것들에 대해 듣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그 신비들을 선포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3 장 10 절과 베드로전서 1 장 12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 또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세계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전 4 : 9). 따라서, 목회자/사역자가 말할 때마다, 천사들 그리고 악한 정사들까지, 그리고 사람들도 듣고 관찰합니다.

좋은 기초와 기반을 가진 목회자/사역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생명을 지닌 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길을 비추고, 길의 이정표가 되며, 푯말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푯대를 보여주고 그 길을 걷는데 있어서 그들을 돕기를 원하십니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성읍들로 돌아오라” (예레미야 31:21).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즉 당신의 민족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입니다: “ 너희는 가운데서 넘어지고 실족하느냐? 가야할 길과 푯말을 없느냐? "

선하고 합당한, 제대로 된 기초와 기반 위에서 영적 삶이 세워진 진정한 목회자/사역자는, 그가 사역하는 사람들을 위해 길의 푯대 또는 이정표가 되는 것입니다.

영적 삶의 기초는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강의 시리즈에서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우리는 이미 두 가지 주요 기초에 대해 말했습니다. 즉, 대가를 치르는 것과 마음의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나뉘지 않은, 분열이 없는 마음이어야 하며, 또한 마음이 취할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자주 저지르는 안좋은 일 중 하나는 우리의 마음을  방향없이 놔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특정한 방향을 취하지 않을 때, 마음은 상하좌우로 요동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 안에 있다가, 또 교회 안에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전혀 방향이 없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은 여기도 저기도 아닌, 안에 있지도 안고 밖에 있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마음에 특정한 향/맛이 없는 것입니다. 반면, 주님의 길을 걷는데 가운데 마음을 둔 자들, 자신이 치러야할 대가와 상관없이, 거룩한 열정과 집요함을 갖고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는 자들입니다[2].

영적 삶의 기초에 있어서 세 번째 중요한 점은 올바른 시각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 그리고 원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는 것입니다.

영적 기초의 세 가지 주요 기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대가를 치르는 것

2. 나뉘지 않은, 분열되지 않은 마음; 특정 방향을 취하여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마음

3. 올바른 시각; 이것은 다음의 내용을 포함합니다:

(A)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시각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심;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는 것)

(B) 자신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는 것

(C) 원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는 것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시각

하나님에 대한 보다 더 정확하고 명확한 시각과 비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정확한 시각/비전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변형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 시각을 갖기 위해, 우리는 듣는 것 외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점점 그것이 더 우리 가운데 계시 되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해 듣고 보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생각 가운데 그 올바른 시각과 이해력을 계시하시고, 그것이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우리 안의 깊은 곳에서 형성 될 수 있도록 사용하시는 통로입니다. 내 눈과 귀를 성령님께 내어드릴 때, 성령님은 그것을 통해서 내 마음 속에 올바른 이미지와 시각을 새겨 주십니다.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안에 형성하십니다. 이전에 내가 가진 손상 된 시각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 또는 시각에 있어서 모자란 부분을 완성해 주십니다. 결과는 참되고 진실된 변화와 변형으로 이끌어주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미지와 시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내 생각 속에 그려지고 형성된 올바른 시각과 이미지를 향해 나의 영이 점차적으로 성장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듣고 본 것으로부터 형성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 말씀을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빌립보서 4 장 9 절에 기록된 바: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듣고 보는 통로를 통해 우리는 배우게 되며 받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 가운데 올바른 하나님의 이미지/형상을 형성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우리는 앞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 아버지에 관해 몇 가지 주요 내용을 설명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자이신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 주제는 여러 단계로 제시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단계의 초점은 기초적인 준비의 단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올바른 시각

하나님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여기에 관해 나눌 내용이 매우 많지만, 몇가지의 기본적이고 간단한 점들을 강조하길 원합니다.

우리가 영적 삶 가운데서 성장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가 얼마나 놀랍고 달콤한 것인지를 이해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깊은 내면을  완전히 그리고 온전히 만족시켜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가지고있는 그분에 대한 많은 오해를 바로 잡아 주십니다.

우리는 종종 그분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히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달콤한 아비되심으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때,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두려워 하고 있구나.” 우리는, 아닙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안의 깊은 부분에서 나를 두려워하는 것을 있단다. 이유는 네가 나에 관한 많은 혼란스럽고 잘못된 것을 배우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나 위기가 생길 때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일을 허락하셨습니까?” 사람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것이 너의 유익을 위한 것이야.”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갑작스런 위기와 위험이 일어나도록 허락 하신다는 확신을 우리의 생각 가운데 품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받아 들여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 하셨고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갑작스럽고 안좋은 일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생각과 그런 관점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 안에 깊은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에게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허용 하셨다고 분명히 고백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진실이 아닌 것을 배우도록 자신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면, 그분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향한 그분의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말하실 것입니다. 그것과 반대 되는 그 어떤 것도 그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그분의 뜻은 선하고, 기쁨이 되며, 온전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2 : 2).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성한 성경적 계시를 우리가 삶에서 따라야 할 원리로 만들고, 그 원리에 따라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의 뜻이 선하시다고 말씀 하시면, 이것은 내가 따라야 하는 생활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나는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그분의 모든 방법은 정직하고 의롭기[3] 때문에 그 안좋은 일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 혼란스럽고 곧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 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방법은 항상 곧고 정직하며, 그분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방법은 기쁨이 되고 온전하기 때문에 깊은 만족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안좋은 어려운 일이 하나님에게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다음의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일은 누구에게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의 세상 여정 가운데서, 우리의 길에 들어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나 사단,  두 가지 근원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분의 방법은 선하십니다. 또한 그분의 뜻은 선하십니다. 성경에 언급 된 사단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오는 도둑입니다 (요한복음 10 : 10). 사단은 처음부터 살인자이며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8 : 44).

하나님은 선하신 반면, 원수는 악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정직합니다. 반면 원수의 방법은 거짓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충만함을 주십니다. 내가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 : 10). 반면에 원수는 죽이고  멸망하기 위해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일하는 두 가지 근원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나를 곧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나의 삶을 날마다 선함으로 채우십니다. 내가 그분을 기뻐하고 그분이 내게 주신 모든 것에 만족하게 됩니다.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시편 145:1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록되기를: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편 17:15).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은 충만함과 만족입니다. 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충만함과, 선하심과, 축복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분의 길은 정직하고 곧으며 올바릅니다.

내 삶에서 일어난 일이 곧거나 올바르지 않고 파괴와 기만이 관련되어 있다면, 이것은 원수의 전형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당연히 해야하는 질문은 다음입니다:

무엇이 원수의 손을 나에게 가까이 오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삶의 여정 가운데 걸어 나갈 때, 때로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한 채, 곧은 길에서 약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안전한 경로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내가 안전한 길 (즉, 하나님을 붙잡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걷는 한, 하나님의 선한 손길이 내 위에 뻗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느헤미야 2 장 18 절에서 읽은 바와 같이; “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 선하신 손길이 내 위에 뻗어있는 한, 나는 곧은 길로 인도 받게 되며 하나님의 의와 즐거움과 축복이 나를 채울 것입니다. 나에게 뻗어 있는 그분의 선하신 손은 나를 보호하시고 내 안에 생명을 넘쳐 흐르게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기도 가운데 주의 깊지 않고 조심스럽고 경계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연결을 잃게 되면 내 발은 안전한 길에서 빠져나가게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길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좁은 길로 설명합니다. 주의 깊지 않고, 경계심이 없고 조심스럽지 않음으로써, 나는 내가 눈치 채지 못한 사이 안전한 길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길 바깥쪽에는 다른 손길들이 있습니다. 사단은 그의 모든 정사를 이용합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손과 그의 정사가 나를 둘러 쌀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문들이 닫히며,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엉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하신 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수의 손입니다.

그 원수의 손은 악한 일을 행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우리를 거짓으로 속입니다. 사단의 악한 손은 사라지고, 그의 악한 입술이 일하기 시작하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무척 힘든 날이었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거야?" 그 사람은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입술은 이렇게 또 속삭입니다: 기도하려고 하지 . 하나님은 너를 버리셨어. 어쨌거나 오늘은 너무 피곤 하잖아? 일단 그냥 자고, 나중에, 그래, 다음에 생각하자.”  그러나 그 다음날에는 그 거짓말의 속삭임을 들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더 안좋은 상태로 깨어나게 됩니다. 그는 머리 속에 많은 혼란스러운 생각으로 인해 무거운 상태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는 기도하기 시작하지만 자신이 너무 산란함 가운데 있으며, 혼란스럽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기도를 드렸는지도 확신하지 못하게 됩니다. 실제로, 참된 기도란 생명의 근원과 연결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풍성한 생명과 평강과 빛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경우에는 기도가 끝나더라도 여전히 경직된 채 많은 생각들이 섞여서 혼란스러운  상태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에 대해 분별하고 올바른 시각을 갖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선하신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모든 선하심을 예비하셨습니다: “기록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2 : 9).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시각이 교정되고 그분과의 관계가 바로잡히면서, 나는 매일 이러한 기대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긍정적인 기대와 축복 받을 기대로 하루를 마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날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뻗어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일들이 그분의 선하신 손으로부터 나의 새로운 날에 부어질 것입니다. 기록 된 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예레미야 애가 3 : 22,23).

그 악한 손이 왜 우리에게 다가오고, 왜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고 침묵 하시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고 모든 것을 질서에 따르게 하신다는 것을 다시 강조 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그분의 길 가운데로 걷고 있으면, 그분의 손이 내 위에 뻗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 길에서 떠난다면, 그분은 나를 잡으려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좇아오지 않으실까요?

그 이유는 그분께서 나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유 의지로 나는 그 길에서 떠난 것입니다. 그분은 나의 뜻을 컨트롤 하지도 않으시며, 나를 강요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분은 내가 선택할 자유를 주십니다. 내가 그분의 길 안에 있다면, 그분은 나를 포옹하시고 안아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그분의 길을 떠난다면, 그분은 내게 가까이 계시지만, 나의 자유 의지를 방해 하시거나, 내 선택에 반대되는 무언가를 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좇아 오시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사단은 나를 속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좇아 오시면, 사단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게도 기회를 주십시오; 당신은 나에게 불공평하게 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욥기에 분명히 언급되었습니다[4]. 사단은 하나님 앞에 서서 욥이 의로운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시고 그를 울타리로 감싸 주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욥의 모든 것들을 칠 기회를 달라고 합니다. 그랬을 때  욥이 분명히 주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욥은 그의 자유 의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많은 복들로 인해 그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사단은 말했습니다. 즉, 욥이 그렇게 하도록 주님이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으신다고 대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들은 감싸 안으시고 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욥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를 알고 싶은 것이냐? 그렇다면 그에게 손을 대도 좋다, 하지만 내가 허락하는 선까지만 있다.” 사단은 욥을 건드렸지만 욥은 결국 인정 받았고 사단은 수치를 당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복을 주시니…” (욥기 42 : 12).

여기서 사람들이 죄를 짓고, 영적 삶을 게을리하며, 점차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 그들은 하나님게 이렇게 불평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을 섬기는데 이런 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점차적으로 벗어나고 이탈했으며, 깨어있지 않고 주의 깊게 경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더라도 고통을 겪을 수 있는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고통을 허락하시지만, 그분이 악함을 가져 오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런 다음 그분께서는 그 어려운 상황들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 바꾸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화를 위해, 정결하게 됨을 위해, 사역을 위한 준비를 위해, 또는 우리를 다시 빗으시고 형성하시기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게[5] 하시는 것일 수 있으며, 심지어 그분이 받으신 박해와 억울한 비난의 참여함이 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과 많은 초대교부들과 같이, 이것은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에 대한 간증이 되고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인격이신 하나님의 아버지를 알아야 하며 그분의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분을 인격화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아이콘(형상)을 교회의 가슴속에 배치하며 그분을 가슴(Bosom)[6]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에 대해 알게 될 때, 우리는 그 교제를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한 가슴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고, 당신의 가슴으로 다가가는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고 감싸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풍성한 생명, 사랑, 따뜻함과 힘 가운데 감싸 안아 주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신성한 가슴과 포옹입니다. 그분은 아버지[7] 되시고 어머니 되십니다. 그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너희가 옆에 안기며 무릎에서 것이라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이사야 66 : 12, 13)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기만을 바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 주시고, 우리를 안고 가시기 원하시며, 우리를 위로해 주시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노예의 영으로 그분께 예배 드립니다. 하지만 그분은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노예가 아닌, 그분의 자녀입니다.

어떤 가정에서든 자녀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습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엄마; 오늘 저에게 주실 요청이나 명령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육의 부모와도 적절하지 않고 일반적인 것이 아닌데, 하물며 하늘의 아버지와는 얼마나 더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우리가 자녀 되게 하심을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노예가 아닌 자녀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그분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기도 할 때 특정한 말들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그분과의 관계에 있어서 실제로 적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노예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빈곤하고 부족합니다. 노예의 예배를 받는 주인 되시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분은 생명의 하나님이시며 그 생명을 당신의 자녀들과 나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와의 교제의 이 진정한 차원에 들어가면,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분의 가슴 안에 들어가서 따뜻함과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것을 나눠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 전체로부터 흘러 넘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말 가운데 빛날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생명을 지닌 사람들 (life-bearers)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일견일 뿐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말하면, 그 것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말씀을 토대로 5 가지 주요 요점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늘 우리를 당신의 가족인 자녀들로서 받아 주십니다.
  •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씻기 원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선하고 온전하고 완벽할 때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제가 오늘 넘어져서 진흙으로 덮여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그분께 나아가는 것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오거라, 나는 너를 씻어주고 너의 죄를 용서해 것이다.”[8]
  • 그분은 우리의 삶을 보살피시고 돌보아 주십니다. 그분은 목자이십니다. 우리에게 매일 좋은 선물을 주시는 것이 그분의 기쁨입니다.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 너희 중에 아버지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누가복음 11 : 11-13).

왜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갈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분은 결코 전갈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분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만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교회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즉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슴이 되심에 기초하여 우리의 기대를,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가슴이 되심을 제시함으로써, 기도 가운데 눈을 드는 모든 이들은 감싸 안아 주시기 원하는 그분의 팔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감싸 안아 주실 때, 우리의 죄는 녹아버리고, 그 죄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어깨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용서해 주시고 기억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31 : 34).

  • 그분은 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를 원수로부터 보호하십니다[9].
  •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천국에서 영원한 유업을 준비하십니다.

 

기도

사랑과 위로의 근원되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가슴 가운데 부요하고 풍성한 위로를 준비하셨음을 아직까지도 모르는 많은 고통 속에 있는 영혼들이 많이 있음을 아십니다.

당신께로 우리를 가까이 이끌어 주소서.

오 생명의 근원이시여, 악한 세상 모든 곳에서 죽음이 우리를 쫓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당신께로 가까이 이끌어 주소서; 그래서 죽음이 떠나가게 하시고, 우리가 생명 안에서 거하게 하소서.

오 부요함의 근원이시여,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빈곤과 궁핍한 것을 좇아가고, 결국 우리의 모든 걸음이 빈곤과 곤경으로 둘러싸일 때까지 우리가 그렇게 한다는 것을 당신은 아십니다. 우리를 당신께로 가까이 이끌어 주소서; 그래서 당신의 임재 앞에서 빈곤과 궁핍이 떠나가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게 하소서: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 : 8).

우리가 부요하게 될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고린도후서 6 : 10) 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을 계시해 주시고 드러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이해를 바로 잡으시고 우리를 지켜 주소서.

아멘

[1] 히브리서1:14

[2] 누가복음 9:23; 로마서 8:36

[3] 출애굽기32:4; 시편 92:15; 에스겔 18:25

[4] 욥기 1: 6 – 12

[5] 빌립보서 3: 10

[6] 곱틱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7] 이사야63:16

[8] 시편 51:7, 8

[9] 시편 19:14: “구속자(Redeemer)”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으며, 필요한 모든 보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